絶

역 광장에 먼지를 뒤집어쓴
사루비아꽃이 피어 있네
한때 뜨거운 피들을
온몸으로 품었던 저 꽃들이
그 사랑이 치욕이었다면
이제는 모조리 하혈해 버리고 싶네
꽃잎의 가장자리가 맨먼저 시드는 것처럼
마음도 가장 소중한 것들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져 갔다면,
숨통이 막히도록
내려쬐이는 햇살 아래
그대와 몸 섞었던 붉디붉은 꽃잎들
울컥울컥 마구 토해 버리고 싶네

늦은 오후 시들해진 햇살에도
빛살 부스러지는 현기증이 일어
빈 무덤처럼 허허로운 곳,
꽃 무더기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
헐떡이며 달려가 잠들고 싶네

시인 송정란(정외 77)

건양대학교 공연미디어학부 교수
1990년 <월간문학> 시 부문으로 등단,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
계간 <문학과창작> 편집국장
시집 『불의 시집』 『火木』, 시조집 『허튼층쌓기』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