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건대시절-회심곡

글｜엄기두(국문 78 / 건대사대부고 교사)

1978년이면, 지금부터 3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닿는 거의 한 세대를 격(隔)한 먼 옛날. 그 사이 세기가 바뀌어 일천에서 이천의 뉴밀레니엄이 되었고, 일생에 몸소 겪기 어려운 문명도 바뀌어 그때는 생소했던 디지털시대가 되었다. 참 짧은 기간에 변화가 무쌍하여 스스로가 어지럽기까지 하다.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은 정변이 있었고 대학은 소요사태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휴교사태로 교문이 닫혀있기 일쑤였다. 그 어떤 세대가 어렵지 않았겠냐만은 내가 느끼기에는 465세대가 가장 힘들지 않나 싶다. 누구는 신 세대라고도 하고 또 낀 세대라고도 한다. 앞뒤에 끼여 있어 완전히 시어 버린 세대란 말인가. 이런 마당에 지금 이 순간 1978년에 내가 경험한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을 곧 '전설'이라고 할 것이다.

대학 1년 겨울방학이었지. 우골탑(상아탑)의 방학은 왜 그리도 긴지. 집에만 있기엔 혈기가 끓고, 싸돌아다니기엔 돈이 없어 갈 데라고는 대학 캠퍼스밖에 없었어. 심재추인지 김명환인지 아무튼 78동기 중 키가 제일 작은 두 놈 중 한 놈과 함께였어. 눈 덮힌 캠퍼스는 흰 비단을 펼쳐 놓았던 것처럼 아름다웠지. 이곳저곳 돌아다녀도 우리 문리과대학(현 문과대학)만한 곳은 없었지. 지금도 캠퍼스에 빈 곳이 없을 만큼 웅장한 건물들이 들어서지만. 문과대학의 온순하고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모습은 캠퍼스 내에서 대표성을 부여하여도 시비걸 사람은 없을 거야. 아늑한 크기의 건물에 알맞은 3층. 입구에 교목(喬木)같은 느티나무는 사람이 잘못 손 댄 조잡한 풍경이 아니라 천의무봉한 풍경. 그래서 조작된 인재가 아닌 스스로 만들어지는 천재가 나올 법하지 않던가. 급기야 추위를 못 이기고 지적 탐구심을 이기지 못해 교수님 연구실 탐방에 들어 갔잖겠어. 교양강좌만 듣던 새내기들은 국문학교수님들과는 면식이 익지 않은 터라, 아직은 진정한 국문학도가 아니었지.

첫 탐방지가 김일근 교수님 연구실이었어. 근엄한 용상(?)에 짓눌려 뭔 말을 할까 망설이다가 전날 밤에 방송한 MBC TV <수사반장>의 '회심곡'에 대한 질문을 드렸지. 우선 뜻이 무엇인가, 배경음악에 쓰인 그 노래가 무엇인가, 장르가 뭔가 등등.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무식한가에 대한 질문형식을 빌은 자백이었지.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다 알만한 그런 질문에 교수님께서는 자상하게 불교가사이며, 과거 삶의 반성이며, 사심에서 곧은 마음으로 돌아오게 하는 옛노래라고 일러 주셨어. 그러시며 그 가사의 내용이 궁금하면 중앙도서관에 그 자료의 필경본이 있으니 찾아보라고 하셨지.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통하는 친구와 술잔이라도 앞에 놓여 있다면 더더욱 즐거운 일. 30여 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즐거운 일만이 떠오르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왜 좀 더 여러 교수님의 학덕을 배우려 하지 않았나. 왜 좀 더 책을 체계적으로 읽지 않았나. 왜 좀 더 동기와 선후배들과 솔직한 친교를 맺지 않았나. 왜 좀 더 내 자신에게 성실하지 않고 현실만을 탓했나. 이런 후회와 실망이 훨씬 더 많이 떠오른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궁금하다. 다른 사람도 다 나 같을까.

제발 나만이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으면 정말 좋겠다. 그 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회심곡을 부르지 않을 만큼 후회없이 살 자신이 지금은 있는데….

문득 학교가 보고 싶다. 그때의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