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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 음악대학원 교수, 함신익 (음교 77) 동문 2008-12-22 14:50:17


 

오케스트라의 부흥사. 지휘봉을 든 혁명가, 음악계의 엔도르핀, 마에스트로 CEO. 이 모두가 예일 음악대학원 교수인 함신익 동문을 가리키는 별명들이다. 그가 뛰어들면 음악이 살아나고, 흥하는 기업 같은 오케스트라가 된다니, 그 추진력과 카리스마를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엄격한 완벽주의자로 알려졌던 그는 최근 한결 부드러워진 모습으로 한국을 찾았다.

  

예일대 음악대학원 교수 함신익 동문의 이력이 독특하다. 직업이나 성격 때문이 아니라 편견을 넘어선 그의 인생행로 때문이다. 음악을 전공하려면 집안이 넉넉해야 한다거나, 교수가 되려면 서울대를 졸업해야 한다는 따위의 편견이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가난한 개척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부유함과는 거리가 먼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음악가를 꿈꾸기엔 변변한 레슨조차 받아본 일이 없었다. 장학금을 받으며 모교 음악교육과를 다녔으며, 한국의 음악대학에 지휘 전공이 없던 시절에 ‘지휘자’를 인생목표로 삼았다. 대학 졸업 후 무작정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84년 당시 그의 주머니에는 단돈 200달러가 전부였다.


그리고 24년이 지났다. 그는 그동안 ‘미국의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갈 차세대 지휘자 5인’중 한명으로 거론됐는가하면, 1995년에는 1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한국인 최초로 예일대 교수가 되었다. 현재 예일 음악대학원 지휘과 정교수이자 예일 필하모니아 지휘감독, 세계 각국의 메이저 오케스트라로부터 객원지휘자로 초청받는 등 최고의 위치에 올라있다. 대학을 마치고 미국유학을 떠난 그는 장학금으로 학비를 해결하고 생활비는 냉동트럭 운전기사, 식당웨이터, 지압사 등을 해가며 벌었다. 몰고 다니던 중고차가 멈춰서 견인차를 불러야 했을 때는 50달러의 견인료가 없어 오페라 아리아를 들려준 일도 있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지독한 날들이었다. 하지만 지휘자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라이스 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이스트만 음악학교에서 지휘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그는, 재학당시 깁스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대규모 오케스트라로 발전시켰다. 1991년 폴란드 피텔버그 국제지휘대회 입상으로 세계무대에 데뷔해, 고정관념과 형식을 파괴한 기발한 기획과 운영방식으로 ‘오케스트라 부흥사’라는 명성도 얻었다. 경기 침체로 비즈니스가 막혀있던 미국 텍사스의 애벌린 시에서는 ‘애벌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후원기업을 끌어들였고, 이에 애벌린 시가 ‘함신익의 날’을 선포하기도 했다. 이후 그린베이 교향악단, 투스칼루사 필하모닉 상임지휘자,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한국 대전 시립교향악단 예술 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예일 음악대학원 교수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할 듯 싶었으나 그의 대답은 간결하고 명료했다. 일류대학이란 간판이 아닌, 학생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양분을 제공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3류, 4류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모교에서 4년간 음악교육을 받았습니다. 모교는 제가 음악과 지휘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도록 용기와 영감을 준 곳입니다. 학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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